굽타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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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년 ~ 550년)

굽타 왕조

굽타 왕조는 쿠샨 왕조 뒤를 이어 등장한 인도 북부와 중부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강력한 왕조이다. 넓은 국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선진적 행정 시스템을 갖추었고, 발달한 도시 상업과 활발한 해외 교역을 통해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번영하였다. 이시기에 이르러 힌두교 철학이 완성되었으며, 과학 기술, 수학, 예술 등의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이 이룩되는 등 인도 역사 상 최고의 문화 황금기로 손 꼽히는 시기이다.

왕조의 성립

4세기 중기 무렵부터 거대 제국이었던 쿠샨 왕조는 쇠퇴를 거듭하며 기존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였고, 그 자리를 차지한 신흥 중소국들이 난립해 가는 혼란의 시대로 진입한다. 320년 경 찬드라굽타 1세(Chandragupta I, 재위 320 ~ 335)는 새롭게 세력을 규합하여 마가다 지역(비하르)을 중심으로한 굽타(Gupta) 왕조를 창건하게 된다. 본래 굽타는 공화정 형태의 소규모 국가에 지나지 않았으나, 찬드라굽타 1세 때부터 본격적인 왕조 체제로 전환하여 영영향력을 키워나갔다. 리차비스(Licchavis)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어 과거에 이지역에서 번성했던 마가다국의 정통성을 계승하기도 했다.[1] 그는 비하르 지역과 벵갈 등 인도 북동부 지역을 장악하여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왕조의 발전

이후 계승자인 사무드라굽타(Samudragupta, 재위 335 ~ 380)는 계속되는 정복사업을 통해 동서쪽 양방향으로 영토를 넓혀나갔고, 결국 20여개의 왕국들을 차례로 복속 시켜 힌두스탄 평야를 포함한 북인도 대부분의 영역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인도 남부 여러 소국들도 굴복시키고 조공을 받아 사실상 인도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대제국을 완성했다. 그는 군사적 업적 만큼이나 문화 방면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 자신이 시인이자 음악가이기도 했고, 힌두 문학과 예술의 큰 후원자이기도 했다. 독실한 힌두교 신자로서 비슈누를 열열히 신앙했으나, 불교 등 타 종교에도 관대하였고 보호에도 힘썼다.


사무드라굽타의 후계자인 찬드라굽타 2세(Chandragupta II, 재위 380 ~ 415)는 부왕의 정복 사업을 이어받아 전쟁과 외교적인 방법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상대국들을 복속시켜 나갔다. 특히 주된 경쟁상대이자 인도 북서부의 지배자였던 사카족을 정복하여 아라비아해의 제해권을 손에 넣었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지중해의 알렉산드리아와 활발하게 교역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번성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인도 경제의 중심지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수도는 지금의 파트나인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였으나, 방대해진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게 위해 일부 기능을 지금의 마드야 프라데시에 있는 우자인(Ujjain)에 분담시키기도 했다. 당시 제국의 번영의 정도는 찬드라굽타 2세 때 발행된 금화와 은화 등 각종 주화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정복사업과 함께 문화예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그의 치세는 예술과 문학의 수준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당대 저명한 산스크리트어 시인이자 극작가인 칼리다사(Kalidasa)를 궁정시인으로 삼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의 불교 승려 법현(法顯)은 인도를 방문(405 ~ 411)하고 난 뒤 저술한 '불국기'에서 당시 굽타 사회의 선진성을 극찬하기도 했다. 찬드라굽타 2세 본인은 힌두교를 신앙했지만 불교자이나교 등 타 종교에도 관대하였다.

쇠퇴와 멸망

찬드라굽타 2세의 아들인 쿠마라굽타(Kumaragupta I, 재위 415 ~ 455) 시기까지는 제국의 면모를 과시하며 전성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쿠마라굽타의 아들인 스칸다굽타(Skandagupta, 재위 455 ~ 467) 치세 말기(5세기)부터 중앙아시아에서 훈족의 일파인 에프탈(Ephthalites)이 침입하기 시작하여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침과 함께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내분을 극복하지 못하며 결국 6세기경에 멸망하게 된다. 훈족의 침입은 다수의 중앙아시아계 민족들이 인도로 진출하게된 계기가 되었다.[2]

문화 황금기

굽타시대는 다방면에서 발전을 이룩한 황금의 시대로 여겨진다. 특히 정치적으로 본다면 굽타 왕조의 지배자들은 기존의 왕을 부르는 호칭인 '라자(Rajah)' 대신 '최고의 신(Parameshwara)' 혹은 '왕중의 왕(Maharajadiraja)'과 같은 격상된 호칭으로 불려지는 등 안정된 전제왕권이 확립하였고, 중앙집권제와 봉건번국제를 조화시킨 선진적 관료제도도 도입되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도시 단위의 상업 뿐만아니라 해상무역을 통한 해외 교역도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고, 금화나 은화 같은 화폐도 활발하게 발행되었다.


베다 전통은 육파철학의 발전과 함께 현재의 힌두교의 모습으로 진화해 나갔으며, 토착적 요소들을 흡수하면서 본격적인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다. 왕실에서는 왕권 강화를 위해 힌두교를 숭상하기 시작했고, 민간에서도 난해한 교리로 인해 대중과 멀어진 불교를 대신하여 힌두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다만 불교의 학문적, 교리적 연구는 지속되었고, 5세기경 쿠마라굽타 시기에 날란다 대학(Nalanda)[3]이 설립되기도 했다.


굽타 시대는 문화예술도 한층 발달된 시대였다. 문학, 음악, 미술 등 다방면의 예술분야에서 눈부신 성취를 달성했다. 산스크리트어 문학이 왕실의 후원 아래 발전을 거듭했고, 특히 마하바라타(Mahabharata)나 라마야나(Ramayana)와 같은 고대 서사시가 이 시기에 이르러 현재의 형태로 정리되게 된다. 힌두교의 부흥과 함께 다양한 석조사원과 조각장식, 벽화 등이 제작되기도 했다.


수학과 과학도 발달했던 시기이다.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아리아바타(Aryabhata, 476 ~ 550)는 '0'의 개념을 고안해냈고 원주율을 3.1416까지 계산하였으며, 지동설을 바탕으로한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관한 가설을 만들기도 했다.[4]

참고 자료

각주

각주

  1. 이 때문에 굽타 왕조도 과거 마가다 국의 후계 왕조로 분류되기도 한다.
  2. 그중 대표적인 민족이 구자르(Gurjjar) 족으로 이시기부터 구자라트, 라자스탄 주 등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3.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Ticketed Monuments - Bihar Nalanda
  4. 1975년에 발사된 인도의 최초의 인공위성의 이름도 아리아바타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