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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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
Portrait Gandhi.jpg
본명 Mohandas Karamchand Gandhi
출생 1869.10.02 포르반다르 시
사망 1948.01.30 뉴델리 (79세)
국적 인도 공화국
학력 University College London
직업 독립운동가, 사상가, 정치인
종교 힌두교
배우자 카스투르바 간디
소속 인도 국민회의 (INC)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는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이다. 비폭력 저항 운동의 창시자로서 인도의 위대한 민족주의자, 정신적 지도자, 국부로서 추앙 받고있다.[1] 인도 제국 시절 태어나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인도 민중이 처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노력했고,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사티아그라하 비폭력 철학을 기반으로 일관된 평화지향 저항 운동은 펼쳤다.

유년기, 유학 시절

그는 1869년 지금의 구자라트 주 포르반다르 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지역 소국의 재상(diwan, chief minister)이었고, 모친은 독실한 전통 힌두교 신자였다. 가정은 비교적 유복했고, 어릴때 부터 힌두교 전통에 기반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비록 힌두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이슬람교자이나교 사람들과도 편견없이 교류했다. 7세에 약혼한 카스투르바와 13세에 결혼했다.


본래는 의사가 되고싶었으나, 집안에서 부친의 뒤를 잇는 관료가 되길 원했기에 변호사가 되기 위해 1888년 영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영국 런던 Inner Temple에서 3년간 법률을 공부하였다. 그의 영국생활은 쉽지 않았다. 문화적 종교적 이질감이 그를 힘들게 했는데 특히 채식주의였던 그는 식생활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런던 채식주의 협회(Vegetarian Society)에 가입하여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그곳에서 만난 뜻있는 지식인들과 함께 바가바드기타와 같은 힌두교, 불교 문학 등을 접하며 깊은 종교철학적 사색을 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

그는 변호사 획득한 뒤 인도로 돌아왔으나,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변호사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남아프리카에 있는 인도계 회사에서 1년 단기 계약의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곳에서 백인들에 의한 부당한 인종차별, 민족차별을 몸소 겪으며 점차 사회운동가로 변모해 갔다. 그는 인도인 동포들에게 자신들의 권리와 존엄성을 일깨우는데 힘썼다. 나탈(Natal)의회가 인도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려하려는 움직임은 그를 좀더 적극적으로 민중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서명운동, 탄원서 작성, 언론보도 등을 활용했고, 1894년 나탈 국민회의(Natal Indian Congress)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1899년 남아프리카에서 보어 전쟁[2]이 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민권 등의 보다 큰 권리를 쟁취하기위해 1000여명의 인도인과 함께 의무병으로 지원했다.[3]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는 인도인들의 기여를 평가해주지 않았다. 이후 인도인의 존엄을 지키기위한 남아프리카에서 그의 투쟁은 줄곧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이어져갔다.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에 대한 헌신)이라는 그의 철학적 원리는 이때부터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1915년 인도로 귀환했고, 인도 국민회의에 가입하여 민중운동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는 전후 자치권 획득을 위해 영국 정부 편에서서 인도인 징집 등 지원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919년 영국 정부는 롤라트 법(Rowlatt Act)라는 반영 투쟁을 억압할 목적의 악법을 시행하여 간디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했다.[4] 이에 대한 저항으로 국산품 애용, 영국제품 불매 운동(일명 스와데시, Swadeshi)을 비롯하여 대규모 시위 조직, 영국과 관련된 직업의 보이콧 운동 등 비폭력, 비협조 저항 운동을 이어 나갔다. 또한 그는 영국산 서양옷 대신 전통의상을 고집하며, 물레(charka)를 돌려 직접 옷을 짜는 생활 방식을 고집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간 것이다. 이렇게 민중운동을 이끌어 나가는 것과 더불어 절제되고 경건한 생활태도를 통해 대중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으며 점차 민족 지도자로서 추앙 받게 되었다. 그는 1922년 반체제 운동 선동혐의로 6년형을 선고 받고 투옥되었다가 맹장 수술을 위해 2년 만에 출소한다. 그뒤 몇년간 대외적인 정치 활동은 삼가했다.


1930년, 그의 사티아그라하는 염세법(소금세법)[5]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다. 당시 영국 정부의 소금 전매 정책은 인도 민중들의 생활을 어렵게 하였고, 간디와 네루가 이끄는 국민회의는 이러한 영국 정부의 폭정에 대대적으로 저항 운동을 펼쳤다. 당시 61세였던 간디는 추종자들과 함께 사바르마티 아쉬람에서 구자라트 주 단디까지 무려 390Km를 행진하는 소금 사티아그라하를 주도하기도 했고 이는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에 참여했던 60,000여명의 민중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된다.


1932년 영국 정부암베트카르가 주장한 불가촉 천민의 선거구를 분리하는 방안을 받아들인 것에 대하여 카스트 간 정치적 분리를 막기위한 명분으로 목숨을 건 단식에 들어가기도 했다.


1934년 국민회의 리더 역할을 사임하고 지방에서 민중들 속에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실천하는데 집중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국민회의는 그의 리더쉽을 다시 필요로했다. 인도 국민회의는 2차대전에서 인도가 영국에 협력하는 댓가로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는데 영국은 당연히 그러한 요구를 무시하였다. 1942년 네루와 간디가 중심이 되어 '인도 철수(India Quit)' 결의를 선포했고 이로 인해 네루와 간디를 포함하여 수 많은 국민회의 간부들이 체포당하게 된다. 국민회의의 핵심 멤버들이 체포된 와중에 벵갈 지방과 서북부 지방에는 무슬림 연맹 (Muslim League)이 세력을 넓혀 나갔고 본격적인 무슬림 국가 건설 운동에 돌입했다.


1945년 종전이 된 이후, 더이상 인도를 통치할 명분도 역량도 없었던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인도를 독립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와중에 이슬람 세력은 독자적인 국가를 건립하려 했고, 간디는 이를 막기위해 노력했다. 그의 지도력과 도덕적 권위, 종파를 뛰어 넘어 받고있는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인도 공화국파키스탄의 분리는 끝내 막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무슬림힌두교인들 간의 유혈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양쪽의 원한은 깊어졌다. 특히 파키스탄에 살고 있던 힌두교도와 인도에 살고 있던 무슬림들은 각자 자신의 종교에 맞는 나라로 강제 이주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 당하기도 했다. 1948년 간디는 이러한 갈등 상황을 종식 시키기 위해 78세의 나이로 또 다시 단식 투쟁에 들어갔고, 양 종파간의 표면적인 화해로 사태는 진정될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헌신적 자세에도 불구하고 일부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은 간디를 겁쟁이 혹은 무슬림을 편들어 힌두교를 망치는 매국노라 생각했다. 결국 그는 전직 RSS 단원이었던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에게 1948년 1월 30일 오후 5시 그의 거처였던 비를라(Birla) 저택[6]에서 암살당함으로써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상

그의 사상은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로 대변된다. 산스크리트어로 '진리를(사티아) 찾으려는 노력(아그라하)'이라는 뜻으로서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티아그라하는 '단디 행진'이라 불리는 소금 사티아그라하이다. 더불어 금욕을 뜻하나느 브라흐마차리아(Brahmacharya), 청빈, 무소유를 뜻하는 아파리그라하(Aparigraha) 등도 그의 소신을 보여주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말만 앞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정신을 스스로 지켜내고 지속했다는 점이다.


그는 철저한 힌두교 신자였음에도 이슬람교, 기독교, 불교, 자이나교의 사상을 편견없이 바라봤고, 이러한 다양한 전통들이 혼재해 있는 인도를 하나로 묶기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만 카스트의 엄격성에는 다소 미온적이 었고, 특히 불가촉 천민들을 대변하는 암베트카르와 선거구 분리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등 한계점도 보였다.

비판

그의 업적과는 별개로 몇가지 인간적인 비판점이 존재한다.

  • 전 뉴욕 타임즈 편집장이었던 조셉 렐리벨드는 그의 저서에서 간디는 인종 차별주의자였다는 비판을 했다. 특히 남아프리카에서 그가 주도한 민중운동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상위 카스트 인도인들과 백인들과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한 것에 가깝다고 했다. 그리고 당국에 관공서 출입[7]과 관련하여 흑인들과 인도인들을 구분해서 대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고, 체포되어 흑인들과 같이 수용되는 것에도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고 한다.
  • 그의 성생활에 관한 논란도 있다. 그는 육식, 음주, 성행위를 금하는 힌두교 식 절제된 생활을 고집했는데, 특히 성욕과 관련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수차례 고백했다. 그것을 속죄하는 방법으로 아쉬람(Ashram)[8]에서 젊은 여성들과 함께 성행위가 없이 동침하는 의식을 치루었다. 그 여성들 중에는 그의 비서의 자매였던 18살의 소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대에도 이와 같은 행위에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 그는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와 달리 카스트 제도의 불합리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선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나아가 전통 힌두교적 관점에서 그것을 옹호하는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떠오르던 노동자 문제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는 등 시대의 요구를 담아내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 그의 가정사에도 문제가 많았는데, 그의 아내였던 카스투르바에게는 선물 받는 것을 금지하거나 소에 비유하는 등 하대했던 기록이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가 중병에 걸렸을 때 서양 의술이라는 이유로 페니실린을 처방하는 것을 막아서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 못하게 했다. 결국 수개월 후 그녀는 죽었고, 간디 자신이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영국의사의 진찰을 받는 등 모순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의 큰 아들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는데, 그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희망했지만, 대영 투쟁 중이던 간디는 이에 완강히 반대하였다. 이후 1911년 부터는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도 하는 등 부친과 다른 삶의 방향을 지향하기도 했다.

참고 자료

각주

각주

  1. 인도 루피화 전면의 초상의 주인공은 모두 간디이다.
  2.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계와 네덜란드계인 보어인들 간의 전쟁이다.
  3. 이 공로로 간디는 영국 정부가 수여하는 Boer War Medal (훈장)을 받게 된다.
  4. 특히 구자라트암리차르에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한 암리차르 학살 사건이 대표적이다.
  5. 영국 정부가 독점으로 소금을 판매하면서 일반인에 대한 소금 간접세를 대폭 올리는 법률이었다.
  6. 현재 간디 기념관인 간디 스므리티로 운영되고 있다.
  7. Durban Post Office
  8. 힌두교 수도 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