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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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들은 수천년 전부터 인도 대륙이라는 광활한 무대를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독특하고 개성있는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인도의 역사는 청동기를 기반으로 한 인더스 문명에서 시작한다. 인도 원주민들은 수준 높은 농경문화를 이룩했으며, 이후 인도 대륙으로 침입해온 아리아인들과 함께 인도 정체성의 근간을 형성해 나갔다. 고대에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세력들도 인도 대륙 북서부까지 진출하여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베다 후기 시대의 혼란 상을 정리한 마우리아 왕조가 불교의 융성과 함께 사실상의 최초의 통일 제국을 이룩했다. 쿠샨 제국사타바하나 왕조를 거쳐, 굽타 제국 시기에 이르러서는 화려한 힌두 문화가 꽃피었고, 이후 수많은 왕조들이 경쟁하는 와중에 투르크 계열의 이슬람 세력이 인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인도 문화의 다양성을 더해갔다. 13세기 델리 술탄조를 거쳐, 16세기 무굴 제국과 같은 강력한 이슬람 제국이 등장했고, 1877년 영국에 의해 합병될 때까지 화려한 힌두-이슬람 문화가 융성하기도 했다. 세포이 항쟁을 시작으로 하는 인도 민중들의 끈질긴 반영 독립 투쟁의 결과로 1947년 8월 15일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인도 공화국이라는 자주국가를 건설하였다.


고대 인도인들은 연대 기록이나 인명 기록을 남기는 것에 무관심한 편이었기 때문에, 베다마하바라타 등과 같은 종교 관련 텍스트들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으로 유용한 문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한 면에서 인도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이란, 유적이나 구전 자료, 혹은 타국의 기록 자료 등을 놓고, 역사적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모자이크 퍼즐을 부분부분 맞추어 나가는 형국과 비슷하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대사와 관련하여 더욱 그러하다.

인더스 문명

(대체로 기원전 3300 ~ 기원전 1700)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전 인도 북서부 인더스(Indus) 강 주변에서 발생한 동기(銅器)기반의 거대 문명으로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황하 문명과 함께 세계 4대 문명 중의 하나로 분류된다. 주로 현재의 인더스 강 유역과 파키스탄, 펀잡 지방 등에서 번성했다고 알려져있다. 이 전의 구석기 시대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인도 역사의 출발은 이 때로 보여진다. 철기 문명 기반인 아리아인들의 침입 혹은 자연 재해 등의 이유로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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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 시대

(기원전 1500 ~ 기원전 500)

베다 시대베다(Veda) 경전이 형성된 시기를 말한다. 베다 경전아리아인들 특유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경전으로, 자연신에 대한 찬가와 기도문을 집대성하였다.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500년까지의 시대를 말하며, 베다의 본집이라 할 수 있는 삼히타(Samhita), 즉 리그베다(Rigveda)와 사마베다(Samaveda), 그리고 야주르베다(Yajurveda)와 아타르베다(Atharvaveda) 등이 형성되고 완성되어 간 시기이다.


아리아인들은 우수한 철기 기술과 전차(chariot) 운용술을 통해 선주민이었던 드라비다인들과 여타 아리아인들을 정복해 나가면서 서서히 인도에 뿌리내려 갔다. 이 시기에 이르러 가부장 제도, 장자상속 제도, 카스트 제도와 같은 아리아인들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인도에 수용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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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대국

(기원전 600 ~ 기원전 300)

십육대국(Mahajanapada) 시대는 베다 시대 이후 인도 대륙에 발흥했던 16개의 고대 국가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시대이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비견되는 시기로 국가들 상호 간에 수많은 전쟁이 발생했다. 그 중 마가다, 코살라, 아반티, 밧차 등 4개의 국가가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고, 이 후 마우리아 왕조에 의해 합병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이 시기에는 기존의 브라만교에도 큰 변화가 찾아 오게 되었다. 전통적인 베다 가르침과 브라만 계급의 권위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 우파니샤드를 필두로한 새로운 사상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제식이 중심이된, 폐쇄적인 원시 종교가 고차원적인 철학 사상으로 변모해 간 것이다. 그러한 흐름의 연장선에서 불교자이나교와 같은 신생 종교도 발생하여 당시 인도인들의 종교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시기는 국가들 간의 경쟁 구도 속에서 농업과 상공업 등 경제 전반이 발전하여, 부농이나 자산가와 같은 신흥 지배 계급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전통적인 사회상의 상당 부분이 해체되었던 시대이기도 하다. 더불어 도시화도 상당히 진행되어 분업 시스템, 화폐 경제, 금융업 등도 활성화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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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마케도니아)의 침공

기원전 520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Persian Achaemenid) 왕조의 왕중왕(샤힌샤, shahanshah)라고 칭송되는 다리우스 1세(Darius I, 생몰 기원전550 ~ 기원전 486)는 당시 제국의 판도를 인도대륙 북서부 지역까지 넓혔다. 지금의 펀잡 지방과 파키스탄 의 신드 지방을 제국의 극동 지역으로 삼아 약 200여년간 통치했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쇠퇴해갈 무렵인 기원전 326년, 마케도니아(Macedonia)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Alexandros the Great)가 이끄는 헬레니즘 제국의 군대는 당시 페르시아 영토였던 신드와 펀잡 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인도에 진출하게 된다. 알렉산더드로스 3세는 당시 그 지역의 통치자였던 군왕 포루스(Porus)를 히다스페스(Hydaspes)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정복에 성공한다. 이후 그들은 여세를 몰아 동진을 계속했고 갠지스 강을 경계로 당시 16개국 중 하나인 마가다(Magadha)국의 저항에 맞이하게 된다. 마가다 국의 난다(Nanda) 왕조는 당시 인도 북부에서 거대 제국을 이룬 강대국으로서 보병 200,000명, 기병 20,000명, 전차 2,000대, 코끼리 3,000마리 이상되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었다고 알려져 있었다.[1] 다만 알렉산드로스 3세는 본인의 부상과 병사들의 폭동을 이유로 회군을 결정함으로써 양국간의 실질적인 교전은 없었다고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본국으로 회군하면서, 자신이 확보한 펀잡 지방에 병력의 일부를 주둔시켜 인도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시켜 나갔다.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 세력이 장악했던 인도 북동부 지방은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문화의 용광로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간다라 지방에 뿌리내린 그리스식 형상미술은 불교와 결합하여 이후 대승불교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우리아 왕조

(기원전 322 ~ 기원전 185)

마우리아(Mauria) 왕조는 기원전 322년 마가다국을 정복한 찬드라 굽타(Chandra Gupta Mauriya, 재위 기원전 322 ~ 기원전 298)에 의해 성립된 왕조로, 아소카 대왕 시기에 인도 대륙의 대부분을 정복하기도 했던 최초의 통일 제국이다. 이시기에 불교가 융성하여 세계 종교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아소카 대왕 치세에서 최전성기를 누리던 제국은 그의 사후 분열을 거듭해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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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샨 왕조 / 사타바하나 왕조

쿠샨 왕조와 사타바하나 왕조

쿠샨 왕조

(30 ~ 375)

중국 서쪽 출신의 샤카족 일파가 인도 북서쪽으로 진출하여 그리스 잔존 세력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이다. 카니슈카 대제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거대 제국으로 발전했고, 그의 사후 점차 몰락의 길을 걸었다. 대승불교가 중심이된 화려한 불교 문화가 꽃피워지고, 중국 등 동아시아로 전파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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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바하나 왕조

(기원전 30 ~ 기원후 220)

마우리아 왕조 멸망이후 인도 북쪽에는 쿠샨 왕조가 들어섰을때, 인도 중부에는 사타바하나(Satavahana) 왕조가 힘을 키웠다. 그들의 기원은 불분명하나 지금의 텔랑가나, 안드라 프라데시, 마하라슈트라 지역 등 데칸 고원을 중심으로 번성했고, 오랜기간 사카족의 서 사트라프 왕조(Saka Western Satraps)와의 투쟁속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드라(Andhra) 왕조라고도 불린다. 가우타미푸트라(Gautamiputra, 2세기 경) 시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3세기 초 여러 소왕국들로 분열되며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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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타 왕조

(320 ~ 550)

쿠샨 왕조가 멸망하고 혼란기를 거친 후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굽타 왕조라는 강력한 제국이 들어선다. 지속적인 정복사업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여 인도 북부와 중부 등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고, 사실상 인도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 제국으로 성장했다. 굽타 시대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발전한 황금 시대로 여겨진다. 종교적으로도 인도 브라만교로 대표되는 전통신앙이 현대적 의미의 힌두교로 진화, 발전되어 점차 지배적인 종교가 되기 시작한 시대로도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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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

굽타 왕조가 몰락한 이후 인도는 다시금 군소국들이 난립하는 혼란의 시기를 맞이한다. 굽타 왕조 몰락 이후 부터 무굴 제국 이전까지를 중세기로 구분한다.[2] 이시기에는 이전의 마우리아 왕조굽타 왕조 같은 거대 통일 제국은 들어서지 못했다. 더불어 중동에서 발흥하기 시작하는 이슬람세력의 인도 진출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불교굽타 왕조 이래로 쇠퇴를 거듭해서 본격적으로 힌두교에 밀려나기 시작했고, 새롭게 이슬람 세력이 대두되면서 민간에서도 밀려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인도 불교는 대승불교의 발현 이후 상좌부 등 기존의 전통들과 끝없는 이론 논쟁에만 골몰해 왔기 때문에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인 방향으로만 과도하게 흘러갔다. 결국 일반 대중의 정서와는 유리되는 흐름이 강해진 것이다. 또한 8세기 경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진언 및 주술 등이 가미된 밀교 형태도 번성하기 시작하는 등, 힌두교와의 차별성도 점차 상실하게 된다. 다만 중국 당 제국과의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로의 불교전파(특히 대승불교)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밀교 계통의 불교티베트로 전파되기도 했다. 한편 이시기에는 힌두교철학적 이론 구성이 고도화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샹카라(Adi Shankara)로 대표되는 베단타(Vedanta) 학파가 융성하게 되면서, 힌두 철학은 발전 궤도의 최정점에 점차 다가서게 된다.


이시기 인도 북부에는 대표적으로 구자라-프라티하라 왕조(Gurjara-Pratihara Dynasty, 740 ~ 1018)와 팔라 왕조(Pala Dynasty, 750 ~ 1174)가 들어섰다. 중부 데칸 고원에는 라슈트라쿠타 왕조(Rashtrakuta Dynasty, 753 ~982), 찰루키아 왕조(Chalukya dynasty, 5543 ~ 753) 등이 발흥했다. 그리고 인도 남부에서는 팔라바 왕조(Pallava dynasty, 275 ~ 897), 촐라 왕조(Chola dynasty, 300 ~ 1279), 체라 왕조(Chera dynasty, 기원전 3세기 ~ 기원후 1124), 판드야 왕조(Pandya dynasty, 기원전 6세기 ~ 기원후 16세기) 등이 번성했다.

  • 체라 왕조(Chera dynasty, 기원전 3세기 ~ 기원후 1124)

이슬람 세력 진출 시기

이슬람 세력은 대략 8세기 경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까지 세력을 확장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인도 역사에 등장게 된다. 자연스럽게 인도 왕조들과 조우가 시작되었는데, 당시는 인도 북부에는 굽타 왕조 이후 번성한 구자라-프라티하라 왕조가 건재해 있었기 때문에, 이후 수세기 동안 아라비아의 이슬람 세력의 인도 진출은 저지되게 된다. 다만 구자라 프라티하라 왕조가 멸망한 이후인 11세기경부터 군소 왕국들이 난립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는데, 이때부터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문화가 가미되어 문화적 다양성이 더욱 더 증가하게 된 것이다. 주로 투르크계 민족이 지배층을 이루고 이슬람 사상을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었으나, 민중들의 대부분은 힌두교를 신앙했다. 다만 기존의 힌두교인들 중 사회적(하위 카스트의 지위 개선 혹은 사면), 정치적(중앙 진출), 경제적 이유로 자발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생겨나기 시작하는 등, 말 그대로 힌두교와 이슬람 문화의 융합 혹은 이슬람의 인도 토착화가 시작되는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이시기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 항로 개척을 위해 항해를 시작하여 인도 캘리컷에 도착(1498년)하기도 했다. 이를 기점으로 유럽인들의 인도 진출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포르투갈의 경우 우수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인도양까지 세력권을 넓혔으며, 아폰수 드 알부케르(Afonso de Albuquerque) 제독의 걍우 비자푸르(Bijapur) 왕국의 고아(Goa)항을 점령하여 인도 진출의 실질적인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인도에서 이슬람 왕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점은 가즈니(Ghaznavid, 977 ~ 1186) 왕조가 인도 대륙에 진출한 시점부터이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흥한 투르크계 세력으로, 특히 최전성기인 마흐무드(Mahmud, 재위 998 ~ 1030) 시대에는 인도 서북부의 펀잡 지방을 완전히 차지한 뒤, 수십차례에 걸쳐 인도 대륙으로 침공을 시도 했다. 가즈니 왕조 이후 두각을 나타낸 같은 아프가니스탄-투르크계의 고르(Ghorids, 1011 ~ 1215) 왕조는 무하마드(Muhammad, 1173 ~ 1202) 시기에 이르러, 마찬가지로 펀잡파키스탄 지방을 확실히 손에 넣었고, 지속적으로 인도 대륙을 공략해 들어갔다. 당시 이들의 진출은 구자라트 지방에서 번성했던 차우한(Chauhan)[3] 왕국의 완강한 저항에 막히기도 했으나, 결국 이를 모두 물리치고 인도 동북부의 갠지스강 유역에까지 세력권을 확장시키게 된다. 무하마드가 암살되어 죽기 전까지 인도 공략은 계속 되었는데, 그 위세는 비하르벵갈 지역까지에 미치기도 했다.

델리 왕조

(1206 ~ 1526)

고르 왕조 장군 출신이었던 아이바크에 의해 델리 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진 이슬람 왕조이다. 크게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클라크 왕조, 사이이드 왕조, 로디 왕조 시대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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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야나가라 왕조

(1336 ~ 1646)

비자야나가라(Vijayanagara) 왕조는 13세기 인도 북부 투클라크 왕조 등 이슬람 세력의 남하를 저항하는 과정에서 인도 남부에서 세력을 형성한 힌두교 계열의 왕조이다. 하리하라 1세(Harihara I, 재위 1336 ~ 1356)는 당시 인도 남부의 마두라이(Madurai) 술탄국과의 수십년간의 치열한 전쟁과정에서 결국 승리하여 타밀 지역을 포함한 인도 남부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기도 했다. 17세기 강건해지는 이슬람 세력의 남하에 의해 왕조는 쇠락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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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무굴 제국

(1526 ~ 1857)

무굴(Mughal) 제국델리 왕조의 마지막 왕조인 로디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이슬람 왕조이다. 영국에 의해 멸망 당하기까지 약 300여년 간 지금의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지역과 인도 남부 일부 제외한 전역에 영향을 미친 강력한 제국이었다. 마우리아 왕조굽타 왕조 이후 들어선 '형식상'의 통일 왕조로 평가되기도 한다.


무굴(Mughal)은 페르시아어로 몽골을 의미하며 티무르의 후손이자 징기스칸의 후손인 바부르(Babur, 재위 1526 ~ 1530)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지배층은 투르크계 이슬람 세력으로서 델리 술탄의 마지막 왕조인 로디 왕조를 무너뜨리고 인도내 새로운 이슬람 왕조로서 자리매김했다.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연결하는 제국을 건설한 만큼 동서 교역의 요충지인 실크로드를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기도 했다. 다만 민족적, 종교적 이질성 문제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깊어져만 갔고, 이로 인해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통치를 실시하지 못하였기에 때문에 완전한 통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4]


이시기에 이슬람 문화는 더욱더 자연스럽게 인도에 뿌리내리게되었고, 투르크-페르시아 문화도 인도문화에 가미되게 되었다. 특히 강력한 통치기반 속에서 장려된 건축 및 예술 영역의 발전으로 굽타시대 이후 다시금 문화적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기도 하였는데 당시 세워진 수많은 성, 공공시설, 모스크, 특히 그중 타지마할(Taj Mahal)로 대표되는 건축물 들은 당시의 번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페르시아 양식과 포르투갈을 통해 들어온 유럽식 원급법 등의 도입은 인도 미술 수준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포르투갈의 고아(Goa)항 점령을 기점으로 유럽인들의 인도 진출도 가속화되었던 시대이다. 15세기 포르투갈 세력 외에도 16세기에는 네덜란드 세력이 교역을 위해 인도에 진출하게 된다. 그들 내륙 이슬람 세력(오스만 등)에 막힌 동방 교역로를 대신할 수 있는 해상 교역루트를 개척하기 위한 목적에서 결국 인도에까지 진출하게 된 것이다. 이를은 향신료와 직물 등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남기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 세력도 인도의 상권을 손에 넣기위해 득달 같이 달려들었고, 결국 18세기 중엽 프랑스 세력을 꺾은 영국 세력이 동인도 회사를 앞 세워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데 최종 성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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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세력의 인도 진출

1498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 이래로 포루투갈을 비롯한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세력들이 인도에 차례로 진출하였다. 포르투갈은 고아(Goa)항을 탈취하여 동방 무역의 중계기지로 삼고 걸프만에서 부터 인도네시아 까지의 광범위한 해상 무역로를 지배했다. 1602년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에 먼저 진출한 후 인도에 있던 포르투갈 세력을 물리치고 향료와 면직물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차지했다. 영국은 1600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당시 건재했던 무굴 제국과의 교섭을 통해 인도 서부 수라트를 시작으로 인도 주요 거점들에 무역공관을 설치했고, 1668년 포르투갈로 부터 양도받은 봄베이(지금의 뭄바이)를 중심으로 인도 장악력을 넓혀나갔다. 당시 영국의 동인도 회사의 주요 거점은 남부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 서부의 봄베이(지금의 뭄바이), 동부의 캘커타(지금의 콜카타) 지역이었다. 프랑스는 가장 늦게 인도에 진출했는데, 1664년에 이르러 서야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고, 콜카타 지역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 중 두각을 나타낸 것은 단연 영국이었다.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세력들과 충돌이 있었지만 인도 내에서 영향력 차근차근히 다져나가며 헤게모니를 장악해 나갔다. 18세기에는 무굴 제국이 약해진 틈을 이용해서[5] 인도 전역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식민지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늦게 인도에 진출한 프랑스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는데, 3차에 걸친 전쟁을 통해 프랑스 세력을 꺾고 인도에서의 독점적인 패권을 차지하게된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757년에 벌어진 플라시 전투[6]였다. 벵갈 지방의 콜카타에서 태수였던 시라즈 웃 다울라흐(Siraj-ud-daulah)는 지역의 이권을 수호하고자 프랑스 군과 연합하여 영국군을 상대했다. 불과 3000명에 지나지 않은 영국군은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주요 인물들을 매수하는 등 기만책을 적절히 활용해 7만의 프랑스 연합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로서 벵갈 지방의 지배권을 차지한 영국은 인도 식민지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7] 이후 1773년 영국 정부는 인도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콜카타에 총독부를 설치하는 등 식민지화를 위한 행정적인 준비도 마치게 된다.


영국의 야심을 막는 것은 비단 다른 유럽 세력만이 아니었다. 당시 인도인들도 영국의 야심을 두려워했고 저항했다. 그중 남인도에서의 반영 항쟁이 가장 치열했는데, 당시 인도 남부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마이소르(Mysore) 왕국의 저항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1767년부터 1799까지 30여년간, 4차례에 걸친 전쟁[8]을 통해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결국 패배하였고, 해당 영토는 영국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인도 남부 지방을 확보한 영국은 중부 지방의 패자 마라타 연맹과도 충돌[9]하였다. 그들도 매섭게 저항했으나 1818년 마라타 호족들의 내분 상황을 잘 이용한 영국에 의해 결국 패배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 세력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출하는 것을 견제한다는 구실로 신드 지방을 무력으로 병합하였고, 펀잡 지역에서 건재했던 시크 제국과도 2차례에 걸친 전쟁[10]을 통해 복속시키게 된다. 이렇듯 영국 세력은 무력을 통한 노골적인 군사 정복을 통해 인도 전체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견제 세력이 없어진 영국은 가혹한 수탈로 인도를 쥐어짜기 시작했고, 그에 대항하는 인도 민중들의 저항운동도 점차 활발해졌다. 비록 영국군대에 의해 진압되어 실패하였지만, 1857년에 발생한 세포이 항쟁은 당시 가장 거대했던 대영 투쟁운동으로서 평가된다. 인도인들로 구성된 영국군 용병(세포이)들이 처우에 불만을 이유로 봉기를 시작했고, 인도 민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대영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대 시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정부는 동인도 회사를 청산하고 직접적인 식민통치를 시작하기로 결심했고, 1877년 인도 제국(Btritish Raj) 출범시키게 되었다.

마이소르 왕국

(1399 ~ 1950)

마이소르 왕국인도 남부 지방에 존재했던 왕국이다. 16세기 비자야나가라 왕조로부터 독립한 이래로 세력을 꾸준히 키워왔고, 18세기 술탄의 통치 시기에는 카르나타카타밀 나두 지역 등 인도 남부 지방을 지배하는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했다. 영국에 의해 사실상 멸망 당하여 속국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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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타 연맹

(1674 ~ 1818)

마라타(Maratha) 연맹는 무굴 제국이 인도에서 세력을 떨치던 시기에 인도 중남부 힌두교 세력이 무굴 제국에 대항하여 세운 호족 연합 형태의 국가이다. 무굴 제국이 약해지는 상황속에서 입지를 다졌으며 이후에는 영국의 인도 진출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영국에 의해 합병되는 1818년까지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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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 제국

(1801 ~ 1849)

시크 제국란지트 싱펀잡 지방에 세운 시크교 국가이다. 인도 북서부에서 최후까지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으나, 란지트 싱 사망 이후 내분을 거듭했고, 결국 영국에 의해 멸망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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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제국

인도 제국

(1877 ~ 1947)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이후, 무굴 제국을 공식적으로 멸망시키고, 직접적으로 인도를 통치하기 위한 제반 절차에 들어갔다. 우선 동인도 회사를 청산한 뒤, 1877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황제의 타이틀을 겸하는 형태로 인도 제국(Indian Empire, British Raj)[11]을 창설한다. 이 거대한 피식민지국은 1947년 인도 공화국파키스탄 등이 독립할 때까지 70여년간 존속했다. 인도를 차지한 영국은 그 기세를 이어 인근의 아프가니스탄과 버마까지 합병하는데 성공한다. 이로서 당시 인도 제국은 지금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미얀마,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방대한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과거 마우리아 왕조굽타 왕조, 무굴 제국의 경우 인도 대륙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완벽한 통일 제국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특히 인도 남부의 타밀 나두 같은 지역의 경우 대체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비록 영국의 강제 병합에 의한 것이지만, 인도 제국에 이르러서야 최초이자 실질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를 실질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완전히 장악한 영국은 인도에 대한 차별정책과 폭정을 계속 이어갔다. 이에 대항하여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하는 반영(反英) 독립 투쟁도 인도 지식인과 민중을 중심으로 다각도로 전개되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단체는 1885년 설립되어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가 중심이 된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였다. 이전에 다양한 문화권, 종교 전통 등으로 분열되어 있던 인도인들이 하나의 인도인로서 민족의식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불어 이성주의 합리주의에 근거한 서구 사상이 인도 지식인 계층에 수용되기 시작했고, 영국 정부의 편의를 위해 주입되었던 영어가 인도에 본격적인 공용어로서 수용되기 시작했다.


2차대전 이후 인도를 더이상 식민지로 유지할 수 없었던 영국은 인도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947년 인도 제국을 해체하였고, 지금의 인도 공화국파키스탄이 독립하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독립 이후 (인도 공화국)

(1947 ~ )

1947년 8월 15일 인도 제국은 해체되었고, 인도인들은 드디어 영국의 지배로 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다만 인구 절대 다수인 힌두교인들과 나머지 이슬람교도들 간의 분리는 막지 못했다. 펀잡 지방과 벵갈 지방의 무슬림들은 파키스탄으로 따로 독립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양 종교 간의 유혈충돌이 발생했고,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양 종교간의 화해를 위해 힘썼으나 힌두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1950년 1월 26일 제헌 헌법이 시행되었고, 1952년 인도 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의 수장 자와할랄 네루총리로 한 초대 연방 의회가 구성되었다. 네루 정부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를 결합한 사민주의 노선을 통치 기조로 삼았다. 또한 수많은 민족 및 종교 전통들이 존재하고 있는 인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종파주의를 엄격히 배제하면서 완전한 세속주의 추구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네루 자신은 총리겸 외무부 장관을 겸직하면서 미국과 소련 양강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중립주의 노선을 유지하려 했고, 이를 통해 제3세계의 지도적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파키스탄카슈미르 지방의 영유권 문제를 원인으로 전쟁을 겪기도 했고, 티베트 문제로 중국과도의 국경 전쟁[12]을 겪기도 하였다.


네루는 1964년 5월 27일 사망할 때까지 총리를 역임하여 인도의 민주적 통합에 힘썼고, 그 뒤를 이은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13]가 1967년 국민회의의 수장이되어 총리로 취임했다. 인디라 간디 정부는 선진적인 농업 기술 도입을 내용으로하는 이른바 녹색혁명을 추진하여 농업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1971년 방글라데시[14] 독립 문제를 원인으로 한 파키스탄과의 3번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고, 1974년 라자스탄 사막에서 실시된 첫 실험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다만 1975년 본인에게 제기된 부정선거 혐의로 인해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비상조치'를 선포하여 강압적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도 했다. 비상조치 기간 동안 인디라 간디 정부는 민중들의 헌법상 기본권을 임의적으로 제한하였고(특히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 등), 정치적 반대파들을 대거 체포하여 투옥시킨 뒤 무자비하게 억압했다. 그리고 나름의 개혁적 조치의 일환으로 강제적인 산아제한 정책 및 슬럼 철거 계획 등을 추진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민중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게 되어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1977년 그녀는 돌연 비상 조치를 해제하고 총선을 다시 실시했는데, 야당연합(Janata Party)에게 패배하여 또 다시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다. 1980년 총선에서 다시 재기에 성공하였으나, 1984년 펀잡 지방의 시크교 분리주의자들의 독립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에 불만을 품은 시크교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하게 된다.


1984년 인디라 간디의 아들 라지브 간디(Rajiv Gandhi)가 그녀를 뒤이어 총리에 취임했다. 그는 1991년 스리랑카 반군 단체의 테러에 의해 사망할 때까지 인도 국민회의의 핵심적 리더 역할을 했다.


1996년 총선에서 힌두교 민족주의 정당인도 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BJP)이 집권하였고, 이후 1998년, 1999년 총선에서도 인도 국민회의인도 인민당에 패배하게 된다. 라지브 간디의 부인 소냐 간디(Sonia Gandhi)는 1997년 부터 국민회의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고, 그녀의 아들 라훌 간디(Rahul Gandhi)의 도움과 함께 2004년 총선, 그리고 2009년 총선에서도 국민회의의 승리를 이끌어 나갔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총리가 되는 대신 만모한 싱(Manmohan Singh)을 총리로서 대신 지명했다.


2014년 총선에서 인도 인민당인도 국민회의를 누르고 압승을 거두었고 재집권에 성공했다. 현재 총리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이다.

참고자료

각주

각주

  1.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크(Plutarch)의 기록
  2. 물론 임의적인 시대 구분이므로 수정 환영.
  3. 당시 군주는 'Prithviraja Vijaya'라는 서사시로 유명한 프리트비라자(Prithviraja, 재위 1178 ~ 1192)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4. 특히 아우랑제브 시대는 영토적으로는 인도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폭정과 무자비한 정책으로 제국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5. 특히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의 무굴 제국 침략 시기
  6.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일어난 7년 전쟁의 인도 지역 전투
  7. 특히 벵갈 지방의 풍부한 재원은 동인도 회사의 재정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8. 영국-마이소르 전쟁
  9. 영국-마라타 전쟁
  10. 영국-시크 전쟁
  11. 인도에서는 British Raj라고 부른다.
  12. 당시 인도는 중국군에게 유린당하다시피 패배했고 서방의 도움과 네루의 외교적 노력으로 간신히 영토 보전하였다. 이후 인도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3. 그녀의 남편이 페로제 '간디'였다. 마하트마 간디와는 상관없다.
  14. 당시는 파키스탄과 같은 나라로서 동 파키스탄이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