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라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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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라 간디
Indira Gandhi
Indira Gandhi 1977.jpg
본명 Indira Priyadarshini Gandhi
출생 1917.11.19 알라하바드
사망 1984.10.31 뉴델리 (66세)
국적 인도 공화국
학력 옥스포드 대학교
직업 정치인
종교 힌두교
배우자 페로제 간디
자녀 라지브 간디, 산자이 간디
부모 자와할랄 네루
소속 인도 국민회의 (INC)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는 인도 공화국 정치가이자 제3대 총리이다.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의 딸이자 라지브 간디의 모친이다.

초기 생애

인디라 간디는 네루의 외동딸로 1917년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주로 고향 알라하바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1937년에는 옥스포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했다. 그곳에서 만난 페로제 간디(Feroze Gandhi)와 1942년에 결혼하게 된다.[1][2] 1941년 학업을 끝내지 못하고 인도로 돌아왔고, 네루가 인도 국민회의 (INC)를 이끌며 반영 독립운동을 이끄는 동안 공적인 자리에는 나서지 않았다.

정치 이력

독립 이후 초대 총리에 오른 아버지 네루를 비공식적으로 보좌하며 정치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집무실에서 수행비서로서 상주했으며, 해외 순방시 동행하기도 했다. 1959년에 인도 국민회의 당수로서 활동했으며, 1959년 케랄라에서 집권한 인도 공산당 정부를 해산하는데 주된 역할을 했다.


1964년 자와할랄 네루의 사망 이후, 라쟈 사바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랄 바하 두르 샤 스트리 정부의 정보 통신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6년 총리가 갑자기 사망하여 총선이 실시되었고 그녀는 반대파의 정치적 견제를 물리치고 인도 국민회의를 승리로 이끌어 3대 총리에 오르게 된다. 1971년 총선에서도 승리하여 비상조치 해제 후인 1977년 총선에서 패하기 까지 연속으로 집권에 성공한다.


그녀가 집권하는 동안, 선진적인 농업 기술 도입을 내용으로하는 이른바 '녹색혁명'을 추진하여 농업 경제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으며, 1971년 파키스탄과의 전쟁[3]에서 승리하고, 1974년 최초의 핵실험에도 성공하여 강하고 명민한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1973년 북인도 등지에서 높은 물가와 정책실패, 그리고 부정부패 등을 이유로 대중 시위가 발생했고, 1974년 부정선거 혐의로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등 정치적 위기를 맞이 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75년 비상조치를 발동하여 정치적 반대파들을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고,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기본권을 광범위하게 제한하기에 이른다. 이에 반대하여 힌두교 근본주의자를 포함한 야당 세력들은 반정부 민주화 투쟁으로 맞섰다.


비상조치 기간 동안 2인자였던 그녀의 차남 산자이 간디는 무리한 가족계획, 슬럼가 정비 사업 등으로 국민적인 원성을 사기도 했다.


1977년 비상조치를 해제하고 총선을 재 실시했다. 결과는 국민회의에 맞서는 야당연합인 Janata Party가 승리하여 최초로 정권교체가 이루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디라 간디를 비롯한 인도 국민회의 지도부는 정치적으로 큰 시련을 맞게 된다. 그녀는 그녀의 아들 산자이 간디와 함께 Janata Party 정부로부터 대대적인 세무조사, 청문회 출석, 공개적 비난 등 온갖 종류의 보복을 받기 시작했고, 집권하면서 저질렀던 부정 및 범죄 혐의 등을 이유로 구속까지당하게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바닥부터 민심을 훑어 나가는 전략으로 차츰 지지세를 회복했고, Janata Party 정부의 실정을 비난하면서 정치적 재기를 노렸다. 결국 1980년 7번째 치러진 총선에서 인도 국민회의를 이끌며 승리하였고, 다시 정치적으로 부활하여 총리에 오르게 된다.

사망

1984년 5월 펀잡 주에서 시크교 원리주의자들이 결성한 무장단체를 중심으로 시크교도 분리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다수 시크교도들의 지지를 받으며 황금 사원을 점거했고 장기 농성에 들어갔다. 인디라 간디 정부는 이에 단호하게 대처했다. 6월 탱크 등을 동원하여 황금 사원을 점거하고 있던 분리주의자들을 모두 사살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 되는 듯 했다.[4] 이로 인해 인디라 간디는 수많은 시크교도들에게 원한을 사게 되었고, 그해 10월 시크교 출신 경호원인 사트완트 싱과 베안트 싱에게 피살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시크교도들을 향한 힌두교도들의 집단 폭행, 학살 사건이 일어났고, 인도 사회 전체에 종교적 갈등이 고조되었다.

정부 평가

그녀는 11년간 총리로 재직하면서 그녀의 부친인 자와할랄 네루의 사회주의, 세속주의 등의 가치를 지키려 노력하였다. 밖으로는 파키스탄과의 전쟁에서 단호한 대처로 승리하기도 했고, 1974년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1975년 비상사태를 선포한 것이나 야당 정치인들을 탄압한 사례와 같이 네루가 추구한 의회민주주의 가치를 본인 스스로 짓밟기도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도 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독재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당시 무리하게 시행한 개혁정책으로 인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경제 분야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고있다.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을 통해 농업 생산량을 높이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Five-Year Plans)을 실시하여 산업화에도 신경을 썼으나, 결과적으로 만성적인 정부실패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물가 관리에 실패하여 식료품 값이 고공행진 하기도 했고, 외환 위기까지 겪기도 했다. 빈곤은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으며, 인도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는 민중들의 삶을 더 어렵게 했다. [5]

참고 자료

각주

각주

  1. 그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파르시' 집안 출신이었다.
  2. 그녀의 이름은 남편 성인 '간디'를 따른고 애초에 '마하트마 간디'와는 혈연상의 연관은 없다.
  3.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4. 일명 푸른 별 작전 (Operation Blue Star)
  5. 영국 식민 통치 시기보다 인디라 간디 시절이 더 어려웠다는 의견도 있다.Indira Gandhi's rule was worse than British, says Bihar govt website; Congress fumes, India TV News, 2016.01.11